설교 제목: 설교 제1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본문에 대하여, 마니교도들을 반박하는 강론
일시: 서기 396년 이전
본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마니교도들에 대하여
1. 우리가 짊어진 빚을 기억하는 이들, 그리고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롬 13:8)는 사도의 판결을 기억하는 이들은, 우리 스스로 그 빚을 갚도록 힘써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참으로 채권자들이 채무자들을 압박하고 고함으로 위협하는 것이 아무리 가혹할지라도, 사랑(Charity)은 그보다 훨씬 더 격렬하게 요구합니다. 사랑은 채무 독촉에서 두려움이라는 무게를 제거하는 대신, 수치심이라는 더 큰 무게를 더하기 때문입니다.
나는 지금 여러분에게 했던 약속을 기억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마니교도들의 어리석고 해로운 억지 주장에 답하겠다는 약속 말입니다. 그들은 그 억지 주장으로 구약을 저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올무의 뱀 같은 똬리를 주의하여 살피십시오. 여러분의 목을 그 올무에서 빼내어 대신 그리스도의 멍에 아래 두십시오. 이 사람들은 방심한 사람들 앞에 이런 종류의 덫을 놓는 대담함을 보입니다. 그들은 신약과 구약의 성경이 서로 모순되어, 한 믿음 안에서 둘 다 받아들여질 수 없다고 말합니다. 특히 그들은 창세기의 시작과 요한복음의 시작이 서로 불일치한다는 것을 우리에게 설득하려고 애쓰며, 마치 두 마리의 황소처럼 그것들을 정면으로 맞세웁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창세기 1:1은 요한복음 1:1과 일치함
2. 그들이 우리에게 말하기를, 모세는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말하면서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된 '아들'에 대해서는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반면 요한은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요 1:1-3)고 말합니다.
이것이 모순입니까? 아니면 경건하게 이해하기를 구하는 대신 이해하지 못하는 것을 맹목적으로 비난하기를 좋아하는 그들 자신이 모순된 것입니까? 내가 만약 창세기가 말하는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신 그 "태초"가 바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답한다면 그들은 무엇이라 말하겠습니까? 내가 비록 신약 성경 자체 안에 나를 지지할 준비가 된 증인들이 있음을 알고 있을지라도, 이것을 증명할 수 없을까요? 그들은 꺾인 목과 같은 교만함을 가지고 싫든 좋든 신약의 권위에는 복종합니다. 주님께서는 믿지 않는 유대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모세를 믿었더라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 5:46)
그렇다면 왜 나는 하나님 아버지가 천지를 만드신 그 '태초'를 주님 자신으로 이해해서는 안 됩니까? 모세는 분명히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기록했고, 모세가 주님에 대하여 기록했음을 확증해 주는 것은 바로 주님의 말씀이기 때문입니다. 아니면 그분 자신이 또한 '태초'가 아니신 것입니까? 유대인들이 주님께 그분이 누구신지 물었을 때, 복음서가 전하는 주님의 답변을 본다면 그 점에 대해서도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분은 "나는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니라" (The beginning, because I am also speaking to you / 요 8:25)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여기에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그 '태초'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아들 안에서 천지를 만드셨으며, 만물은 그를 통하여 지은 바 되었고 그가 없이는 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처럼 복음서가 창세기와 일치하므로, 우리는 두 언약의 일치에 따라 우리의 기업을 보유할 수 있으며, 비난 섞인 억지 주장은 기업을 잃은 이단들에게나 남겨둡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모세를 믿었더면 또 나를 믿었으리니 이는 그가 내게 대하여 기록하였음이라
요한과 바울 사이의 논쟁
3. 복음 전도자 요한이 "만물이 그 안에서 지어졌다"고 말하지 않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through him) 지은 바 되었다" 고 말한 반면, 창세기에서는 "태초를 통하여 하나님이 천지를 만드셨다"고 읽지 않고 "태초에(In the beginning)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읽는다는 사실 때문에 여러분의 분별력 있는 확신이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결국 이렇게 말합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신 것이요 그의 기뻐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9-10)
이 구절에서 여러분은 "그 안에서"라는 말을 들을 때 "그를 통하여"라는 의미도 함께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방식으로, 요한이 말한 "그를 통하여 만물이"라는 구절에서도 여러분은 마땅히 "그 안에서"를 이해해야 합니다. "그를 통하여"라고 읽을 때 "만물이 그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이해할 권리가 내게 거부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창세기에서 천지가 "그 안에서" 만들어졌다고 읽을 때 누가 나로 하여금 그것을 "그를 통하여"라고 이해하는 것을 금하겠습니까? 물론 마니교도들이 이 논쟁을 두 언약 사이의 분쟁에서 신약 성경의 가장 복된 증인들 사이의 분쟁으로, 즉 바울은 "그 안에서"라고 말하고 요한은 "그를 통하여"라고 말한다는 이유로 바울과 요한 사이의 분쟁으로 옮기지 않는 한 말입니다. 우리로 말하자면, 우리는 바울과 요한이 서로 모순된다고 믿지 않으며, 동일한 논리로 이 사람들이 모세와 바울 사이의 일치를 인정하도록 강권합니다.
4. 이 두 사람이 서로 일치하는 것처럼, 요한 역시 양쪽 모두와 일치합니다. 요한은 "그 안에서"라는 의미를 배제하지 않는 방식으로 "그를 통하여"라고 말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거룩한 기록들은 평화롭고 서로 일관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밤하늘을 지나가는 구름을 바라볼 때, 어둠으로 인해 우리의 시력이 혼란을 겪으면 마치 구름이 아니라 별들이 창공을 가로질러 서두르는 것처럼 보일 때가 종종 있습니다. 이 이단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오류라는 흐린 하늘에서 평화를 찾지 못하기 때문에, 오히려 거룩한 성경들이 서로 다투고 있는 것처럼 그들에게 보이는 것입니다.
그 뜻의 비밀을 우리에게 알리셨으니 곧 그 기쁘심을 따라 그리스도 안에서 때가 찬 경륜을 위하여 예정하신 것이니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 다 그리스도 안에서 통일되게 하려 하심이라
성경은 일치함
5. 만약 그들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는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Word)'에 관해 말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것을 양보하여 인정해 보십시다. 즉, 그 '태초'가 하나님의 독생자가 아니라,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고 기록된 것에서 '시간의 시작'을 의미한다고 이해해 봅시다. 이는 다른 피조물이 생기기 전부터 이미 시간이 있었다는 뜻이 아니라(심지어 시간조차 모든 시간의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공존한다고 결코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시간이 천지와 함께 시작되었다는 뜻입니다. 적어도 여러분이 피조물과 창조주 사이의 거리를 인식하고, 하나님이 만드신 그 어떤 것도 그것을 만드신 분과 공존(coeternal)한다고 말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원한다면 그렇게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 할지라도,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창 1:26-27)라고 기록된 본문에서 신격의 위격들의 수는 명확해질 것입니다. 설령 그것이 명백하지 않고, 통일성(Unity)이라는 명칭 아래 지각 있는 독자들에게 삼위일체가 암시되지 않았을지라도, 그것이 요한복음의 시작이 창세기의 시작과 모순된다고 주의 깊은 독자들에게 인상을 줄 이유는 되지 못합니다. 어쨌든 오직 부주의한 독자들만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그러한 화법의 수많은 예를 가지고 있습니다. 주님 친히 말씀하신 구절이 있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지니 하늘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하지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라." (마 5:34-35) 주님께서 여기서 자신에 대해 언급하지 않으셨다고 해서, 저들이 그리스도께서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심을 부정하겠습니까? 또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을지어다 아멘." (롬 11:33-36) 여기에서도 아들의 이름이 명시적으로 언급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만물이 그로부터 나오고, 그를 통하여 나오며, 그 안에 존재하는 한 분 하나님과 주님이 계시다고 말합니다.
그런데 왜 이 사람들은 복음 전도자 요한에게 맞세우기 위해 굳이 모세를 선택하고, 사도 바울을 그에게 맞세우는 것은 거부했습니까? 단순히 그들이 경험 없는 사람들에게 두 언약이 서로 모순되므로 하나는 증거로 받아들이고 다른 하나는 거부해야 한다고 설득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그것이 그들이 노골적으로 가르치는 오류입니다. 만약 경험 없는 자들에게 신약 성경이 그 자체로 모순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미친 듯한 또 다른 잘못된 교리가 있다면, 그 교리는 이 사람들이 모세와 요한에게 하는 것처럼 바울과 요한을 서로 원수와 다투는 자들로 세우는 것 외에 무엇을 더 하겠습니까?
그러나 순전하고 유일한 참된 믿음은 우리에게 바울과 요한이 서로 일치함을 제시하며, 복된 바울이 "만물이 그로부터, 그를 통하여, 그 안에서 나왔다"고 말한 것에서 성부뿐만 아니라 성자와 성령을 이해하도록 가르칩니다. 같은 방식으로, 참된 믿음은 모세와 요한 사이의 평화를 명심합니다. 만약 모세의 본문인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에서 '태초'를 시간의 시작으로 본다면, '하나님'이라는 단어 안에서 삼위일체의 단일성을 아주 단순하게 인식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아무런 거리낌 없이 하나님께서 천지를 만드신 그 '태초'를 아들 자신으로 받아들입니다.
거룩한 성경에서 사용되는 이러한 화법들에 따라 여러분의 주의를 환기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것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기억에 너무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이 정도의 지적만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나머지는 여러분 스스로 탐구하시거나, 적어도 성경을 읽을 때 그것들을 주목하시고, 여러분끼리 친목하며 숙고하고 논의하시기를 권합니다.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 그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육축과 온 땅과 땅에 기는 모든 것을 다스리게 하자 하시고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도무지 맹세하지 말찌니 하늘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보좌임이요 땅으로도 말라 이는 하나님의 발등상임이요 예루살렘으로도 말라 이는 큰 임금의 성임이요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의 판단은 측량치 못할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뇨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뇨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뇨 이는 만물이 주에게서 나오고 주로 말미암고 주에게로 돌아감이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에 있으리로다 아멘
원문 or 출처
Saint Augustine, Sermons 1–19 on the Old Testament, ed. John E. Rotelle, trans. Edmund Hill, vol. I, The Works of Saint Augustine: A Translation for the 21st Century (Hyde Park, NY: New City Press, 1992), 1–5쪽.